인터넷은 우리에게 정보의 바다에 몸을 담그게 하고 전 세계인들과 소통이라는 화려한 세계의 문을 열었지만 그 이면에 인터넷 트롤들이 판을 치는 어두운 뒷골목도 만들었습니다. 인터넷 트롤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조금 생소한 용어일지 모르지만 사이버상에서 익명으로 악성 댓글을 달아 타인을 모욕하고 공격하는 재미로 사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흔히 악플러 라고 불리는 부류입니다.

 

그들은 자기 과시, 냉소, 빈정거림, 비하, 폄하, 욕설, 성차별 등의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네티즌들에게 짜증을 유발합니다. 인간의 이런 언어적 공격성은 오래 전부터 인간의 DNA 속에 코드화되어 있었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 우리 종의 그런 비열하고 찌질한 행동이 인간에게 물리적 충돌을 피하게 함으로서 인간의 생존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악플러들은 어떤 유형의 사람들일까요? 특이한 행동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것을 즐기는 소위 관심 종자들도 있고 정서적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도 있고 타인을 이용하고 조종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고 남의 고통에서 쾌감을 얻는 새디스트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부류들에게 나타나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나르시시즘에 바탕을 둔 자기 과신, 즉 근거없는 자신감이 강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대단한 존재임을 떠벌리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티즌들은 인터넷 트롤이 나타나면 저 악플러 근자감 쩐다.”라고 흔히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소위 더닝과 크루거가 실험으로 밝혀낸 무지해서 용감하며 자신의 능력을 과대 평가하는 부류입니다. 달리 이 말은 악플러 행위가 고질적임을 시사하는 것으로 앞으로도 잘 고쳐지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자기 과신의 나르시시즘이라고 했는데 그것 역시 인간의 긍정적인 특성이 아니지만 역사상 유용한 때가 있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위험을 감수했지만 운이 좋았던 인간들의 유전적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우리 인체에는 도파민을 언제 어떻게 방출할 것인지 결정하는 데 관여하는 DRD4라는 유전자가 있는데 인간의 20%정도는 DRD4의 변종인 DRD4-7R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연구에 따르면 이 변종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이 특히 근거없는 자신감이 강하고 무모한 경향성이 있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20% 정도가 그렇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 변종 유전자가 출현한 것은 인간이 안전한 거주지를 떠나 바다 건너 더 좋은 곳이 있는지 알아보기로 결정했던 시기와 때를 같이했습니다. 그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가 위험을 무릅쓰고 전 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역사에 도움이 된 거죠.

 

이런 자기 과신이 인간에게 모험을 하게 하지 않았다면 크리스토퍼 콜롬부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주인 없는 자원을 쉽게 손에 넣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싸우면 누가 이길지 예단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속된 말로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내 이두박근 보이지?”라고 기선 제압을 하면 때로 치명상을 입었다고 해도 비교적 높은 승산으로 원하는 것을 얻었고 이것은 그들을 배불리 먹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자기 과신은 역사에서 운좋게 좋은 결과로 이어졌을 때가 있었다고 해도 그렇지 않은 때가 더 많았습니다. 이것은 전쟁을 일으켜 문명을 파괴하는 데 일조하거나 주식 시장이나 사업 세계에서 위험을 감수하게 만들어 인간을 망치는 데 한몫을 했습니다. 주변에서 고위험 고수익 투자에 올인하여 재산을 탕진하거나 사업을 시작하면서 자신만큼은 성공할 것이라는 자기 과신으로 집안을 풍비박산내는 경우를 누구나 한번쯤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제 인터넷상에서 공격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습니다. 사이버상의 공격은 감수할 위험이 그렇게 크지도 않습니다. 그들이 활개를 치기에 딱 좋은 조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터넷의 익명성 뒤에 숨어 자기 과시를 즐기고 타인을 공격해 상처를 입히고는 마치 전쟁터에서 승리한 것처럼 쾌감과 희열을 맛봅니다. 그들에게 인터넷은 흥미로운 놀이터입니다. 그것이 악플러들이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 죽치고 앉아 사이버 세계에서 타인을 공격하는 이유입니다. 실제 세계에서는 한대 얻어맞을지 모르니 몸을 사리면서 말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가려진 커튼 뒤에서 대단한 존재인 척 하지만 정체를 알고 보면 보잘 것 없는 오즈의 마법사 같은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이 내용은 로버트 에반스의 나쁜 짓들의 역사를 참조했습니다.)

 

 

 

 

 

 

 

 

 

 

 

   남녀 친구 간에는 대화가 이런 식으로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일과 관련해서도 그냥 내 생각을 밝히는 것에 불과한데 상대방은 문제를 해결에 대한 압박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이 느껴질 때가 있다. 어쨋거나 많은 여자들이 남자들과 나누는 이야기는 여자 친구들과 나누는 이야기와는 좀 다르다고 증언한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의 진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적응된 것이기 때문에 어떤 것이 옳고 그른 문제는 아니다. 언제나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 남자와 가족들이 정서적인 결핍감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해야 하는 여자의 역할 차이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여자들은 이런 동성 친구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스쳐가는 인연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어린 시절이나 중고등학교 시절 친구가 평생 친구로 이어지는 경우가 드물다. 한때 죽고 못사는 모습을 보이지만 결혼을 하면 가족에게 치중하고 때로 자매나 지인을 친구삼을 뿐 우정에 별로 헌신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 역시 인간 관계의 강한 연결 고리인 여자들의 결혼만 눈여겨 볼 뿐 여자들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여자들의 모임이나 우정에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여자들의 우정을 만나서 쓸 데 없는 수다나 떠는정도로 여기는 남자들의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자에게 친구가 어떤 의미인지 방송이나 신문 어디에서도 다루지 않는다. 여자들이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면 우정에 의존하지 않아도 삶의 충족감과 활력이 생긴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보인다. 애석하게도 실제로 그런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달리 위안이 되는 부분은 인생의 만고불변의 진리 중 하나가 안변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것도 변하고 직장도 변하고 사랑도 변한다. 지인 그룹도 어느 순간 완전히 바뀐다. 모든 것이 변하는 데 여자들의 우정이라고 다를 수 있을까?

 

 흔히들 변치 않는 우정이라는 말을 하지만 우정도 라이프 사이클이 있다. 계속 발전해갈 수도 있고 어느 순간 갑자기 소멸될 수도 있고 눈에 보이지 않게 서서히 말라비틀어질 수도 있다. 수십년간 끓어져 있다가 어느 순간 다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런 수많은 변화 속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여자들의 우정이 있다면 정말 매우 값진 것이고 매우 부러운 것이며 매우 특별한 것이다. 설사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인생의 황혼길에 있는 80세 어머니에게 물어보았다.

여자에게 여자 친구가 필요한가요?”

두말하면 잔소리지. 여자만큼 여자를 알아주고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어디 있나? 남편이고 자식이고 손자고 그 역할이 있고 친구 역할이 있지. 그런데 여자들의 우정은 오래 가는 경우가 드물어

 80대 어머니도 느끼는 것처럼 여자들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여자 친구가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여자에게 여자가 필요한 이유는 여자들이 힘들 때 원하는 방식으로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여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이 때부터 그렇다. 남자 아이들은 같이 놀다가 하나가 울면 핀잔을 주지만 여자 아이들은 하나가 울면 화장실로 데려가 위로를 해준다.

 

 또 달리 여자라면 누구나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속상한 일이 있을 때 친구에게 그것을 털어놓는다. 그러면 친구는 그래, 그래 맞아. 네 마음 알겠다...나도 .... 해서 비슷한 일을 경험한 적이 있어. 어이구 정말 환장하겠더라...뭐 그런 인간이 있는지......“ 공감의 말이 오랫동안 이어진다. 그리고 해결책이 나와도 그만 안나와도 그만인 시점에, 혹은 만남을 종료하기 직전에 한두어 마디 툭 던지듯이 흘러나온다. ”그냥 네가 마음 비워라. 혹은 밉지만 한번만 이해해줘라.’ 그러면 그 말은 상대방의 상황에 대한 충분한 공감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매우 짧다고 해도 울림이 있고 마음에 와 닿는 경우가 많다. “그래, 어쩌면 그 말이 맞을 지도 몰라...”이렇게 끝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여자는 친구를 만난 후 마음이 가벼워지고 스트레스도 풀리고 힘도 얻고 의기양양해진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간다.

 

오래 전에 읽은 미국 단편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미국의 유명한 작가 존 업다이크의 작품 구절인데 여자들의 이런 면에 대한 기술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죽음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고 있던 노부인과 중년의 길에 접어 든 내 아내 사이에는 알듯 모를 듯한 사랑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내가 그 노부인을 만나고 온 날이면 더 젊어진 얼굴을 하고 심지어 기쁨의 빛을 띠고 의

기양양해진 모습까지 보이면서 내 늦은 저녁을 차려주러 집으로 돌아왔다.”

존 업다이크는 아내와 갈등 중인 한 중년 남자의 입을 통해 여자들의 우정이 남자들에게 흥미진진하고 감동적이면서도 고통스럽다는 말로 표현했다. 고통스럽다는 말은 주인공 남자가 저 두 여자가 자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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